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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

[심형권 목사] 마태복음 8:14- 34절 묵상

예수님의 치유 사역에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18

본문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경험하는 질병과 고통과 아픔과 연약함은 하나님을 떠난 ‘죄’로 인해 나타나게 된 결과들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류는 모두 이 고통과 저주 아래 살아갑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성공한 삶이라고 해도, 이 땅에서 영원한 삶은 없으며 결국에는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17절) 오신 분이십니다. 열병에 고통하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고, 바람과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고, 귀신을 쫓아 내시는 사역을 통해 이를 증명하십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에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18절). 어디를 가시든지 따르겠다는 한 서기관(19절)에게는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시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 따르겠다는 제자 중 한 사람에게는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나를 따르라’(22절)고 하십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모든 것을 버려 두고 따랐던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의 결단(4:18-22절)이 주저하는 이 사람들과 대조됩니다.  

 

육신의 영달을 위해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따르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이 신앙의 우선 순위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꽃 길이 아니라 광야의 길일 수 있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머리 둘 곳이 없는 예수를 따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 성공’이라고 가르치고 부추기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의 방식을 따라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쁘면 제일 먼저 빼먹는 것이 예배이고, ‘천국 백성으로 살기’와 같은 열망은 다른 ‘위시 리스트’에 묻혀서 제일 뒤로 밀리기 일수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종교적 평안과 행복감’을 추구하는 신앙만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신앙 생활이 아니라 종교 생활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실 때 큰 폭풍이 일자,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이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웁니다. 잠에서 깨신 예수께서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면서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보여주신 예수님의 ‘행하심’을 보고 그 분이 ‘누구인지’ 알았다면 너희가 나를 믿었을 것인데, 예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보다 당장 눈 앞의 현실이 급했던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의 행하심을 보고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가 잔잔하는가?’라고 놀라는 제자들의 말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누구이기에 자연도 순종하는 것일까요?

 

놀랍게도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귀신들의 입을 통해서 확증됩니다. 배를 타고 도착한 가다라 지방에서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두 사람에게서 귀신들을 쫓아내십니다. 그 때 귀신들이 이렇게 외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29절). 예수님은 자연도 귀신도 복종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풍랑이라는 물리적 환경도, 귀신이라는 영적인 도전도 예수님과 함께라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이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군대 귀신들’을 명하여 돼지들에게 들어가게 하자 비탈로 달려가 물에서 몰사합니다. 그 지방의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 그 곳을 떠나라고 간청합니다.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의 능력보다 돼지 떼가 죽어 금전적 손해를 입었다는 현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율법이 금지한 돼지를 키웠다는 사실도 충격이지만, 먹고 살아야 한다는 현실 앞에 믿음을 팔아먹은 유대인들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질병을 고치시고, 폭풍을 헤치시고, 귀신을 쫓아 내시면서 거기까지 찾아오신 예수님을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떠나라’고 하는 가다라 사람들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은 아닌지 뒤돌아봅니다.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을, 당장의 나의 이익과 이해 관계 때문에 ‘떠나십시오’(34절) 하고 거절하지는 않았습니까? 당장의 현실 앞에서 바쁘다는 이유로, 급하다는 이유로, 힘들다는 이유로, 어렵다는 이유로 하나님과의 교제, 그리스도와의 동행의 삶을 빼먹고 살지는 않습니까?

 

성도는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내 안에 이러한 삶의 흔적들이 있어야 성도입니다.

오늘도 말씀과 동행하고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는 나그네 여정 길 되기를 소망합니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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