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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

[심형권 목사] 마태복음 21:12-22절 묵상

나의 판단과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거나 재단하려 하지 마십시오.

본문

 

이제부터 십자가에 달리시고 다시 부활하시기까지 일 주일 간의 행적이 시작됩니다.

 

먼저, ‘성전’이 강조됩니다. ‘성전에서’(12절)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시면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시고, ‘성전에서’(14절) 병자들을 고치셨고, ‘성전에서’(15절) 아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칩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곳이고, 인생 문제의 해결을 받는 곳이며,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곳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사욕을 채우는 장터가 되고, 아이와 같은 순수한 신앙을 짓누르고 거룩을 가장한 형식적 신앙이 판을 치는 장소(15절)가 되버린 것입니다.  

 

참 성전이신 예수께서 거짓 신앙의 난장판이 되어가는 성전 건물을 청결하게 하신 것은 이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그 안에 참된 치유롸 회복이 있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실 것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 상처가 치유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해야 할 교회가 세상의 가치관에 함몰되어 사람의 냄새로만 가득 차 가고 있습니다. 경건을 가장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빙자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경건 놀이’에 속고 있지는 않는지, 자신들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만 무성한 바리새인들의 거짓 경건은 다음날 예수님께서 저주하셨던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한 무화과 나무’의 모습과 같습니다. 성 밖 베다니에서 주무시고 다음 날 아침 다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시던 예수님은 시장하셨습니다. 마침 잎이 무성한 한 무화과 나무를 보셨고, 열매를 얻을까 가까이 가셨습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었고, 예수님은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순간 그 나무는 말라버립니다. 버틀란트 러셀이라는 유명한 무신론자는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무자비한 신을 믿을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 예수님은 이 나무를 저주하신 것일까요?

 

제자들도 궁금했습니다. ‘이 무화과 나무가 어찌하여 말랐습니까?’(20절). 예수님의 대답이 의미심장합니다. ‘믿고 기도해라 그러면 이 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 믿고 구하면 다 받을 것이다.’ 나무가 말랐다는 사실이 아니라 마르게 한 예수님의 ‘선포’에 초점을 맞추시고 그 선포를 ‘기도’라는 주제로 연결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앞에서 ‘성전은 기도하는 곳’라고 하심으로 ‘기도’를 강조하셨습니다.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언부언, 허공에 메아리치는 기도는 아무리 오래 하고 많이 한다해도 허무한 몸부림일 뿐입니다. 응답이 있어야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 즉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욕심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믿음을 가장한 자기 확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의 믿음을 말합니다. 그 믿음으로 구하는 모든 것은 응답받습니다.

 

마지막으로, 무화과 나무를 마르게 하신 예수님이 무자비하다고 생각했다면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무조갱에 던지실 수 있는 분입니다. 구원의 주님은 동시에 심판의 주님이시고, 그가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나의 판단과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하거나 재단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야 말로 불신이고 신성모독입니다. 하나님은 믿고 따르고 신뢰할 우리의 주권자 창조주이시지, 우리가 판단해 믿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믿음 안에 응답이 있고, 참 평강이 있습니다. 이 복을 누리고 맛보는 이 땅의 나그네 여정 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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