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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열전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 (1839-1866년)

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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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개신교 선교사.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알려져있다.

조선에서 사망한[1]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토마스 선교사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침략자로 간주되어 평양 주민들에게 참수를 당하고 순교하였다.

 

 

생애

영국 웨일스 중부 라야다라는 작은 마을에서 로버트 토마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토마스는 라야다 지역의 작은 회중 교회의 사역자인 아버지를 두어 개신교 가정에서 자라났다. 토마스는 1859년 런던 대학교 시스템 뉴 칼리지에서 대학과 신학 과정을 마치고 정식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토마스는 목회보다는 해외 선교 사역에 뜻을 둔 토마스는 런던 선교회 소속으로 부인인 캐롤라인과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몇 달간의 긴 여행 끝에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때마침에 부인이 임신하던 중이라 중국에 한 동안 머물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부인인 캐롤라인이 동료 선교사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져 유산하게 되고 결국 사망한다. 토마스는 이 일로 인해 엄청난 고통과 슬픔에 잠기게 된다.


그 후, 중국내 사립학교 '앵글로-차이니즈'라는 학교의 교장직을 맡아줄 것을 런던 선교회 중국 지부장에게 제안받았으나, 토마스는 고민 끝에 이를 거절한다. 이후 토마스는 마음을 정리한 후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해외 선교에 다시 집중하게된다. 중국에서 조선인 가톨릭 신자를 만난 것을 계기로 하여 1865년 조선에 잠입하여 성경을 배포하며 선교 활동을 벌이다 배가 파손되어 중국으로 돌아간 후, 베이징에 있는 선교회 산하 학교에서 잠시동안 교장으로 부임했다.


이듬해인 1866년, 조선 정부가 프랑스 신부들을 학살한 사건에 항의하기 위하여 조선으로 떠나는 프랑스 함대에 통역관으로 합류하기로 되어있었으나,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때마침 베트남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상하이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토마스는 미국의 상선인 제너럴셔먼호에 항해사 겸 통역으로 탑승하여 다시 조선으로 떠나게 된다.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진입한 후, 평양 관민들에게 통상 수교를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이에 만경대 한사정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이들의 행동을 막아선 중군 이현익을 붙잡아 감금하였다.


사태가 이르자, 평양성 관민들은 크게 격분하여 강변으로 몰려들었고, 셔먼호는 소총과 대포를 관민들에게 마구잡이 쏘아대 사태는 더욱 더 악하되었다. 결국 제너렬 셔먼호는 모래톱에 좌초되었고 이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철산 부사 백낙연 등과 상의하여 대동강 물에 페식용유를 풀고 불을 붙여 셔먼호를 불태워 격침시켰다. 결국 이 과정에서 제너럴 셔먼호의 선원들과 함께 사로잡혀 결박당한 채 성난 군중들에 읳 죽음을 맞이한다.

 

 

평양 대부흥과의 연광성

박규수의 명령으로 배를 불질렀을 때, 토마스는 배에서 빠져나와 여러 사람에게 성경을 건넸는데, 이것이 1907년 평양 대부흥의 기반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당시 12세였던 최치량(崔致良)은 엉결겹에 성경을 받았다가 두려운 마음이 들어 영문주사(營門主事)였던 박영식(朴永植)에게 넘겼고, 박영식은 책을 찢어 벽에 발랐다고 한다. 벽에 적힌 글을 읽다가 그는 신앙을 갖게 되고 기독교인이 되었고, 그의 집은 훗날 평양 대부흥의 중심이 되는 장대현 교회의 시초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밖에도 토마스를 찔러 죽인 박춘권(朴春權)이라는 사람이 처음에는 성경을 거부했지만, 나중에 호기심이 생겨 토마스가 죽은 자리에 갔다가 성경을 읽고 안문교회의 집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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