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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열전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 (1859-1926년)

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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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9년 7월 19일에 영국 런던에 태어난 언더우드는 13세가 되던 해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881년 뉴욕 대학교을 졸업하여 문학사학위를 받고 그 해 가을 뉴브런즈윅 시에 있는 네덜란드 개혁 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 Seminary)에 입학하여 1884년까지 공부하였다. 1883년 11월 장로교 목사가 되었고 당시 영미권의 선교사들이 주로 파견되던 인도 제국에 건너가 목회 활동을 하기 위해 1년간 힌디어와 의학을 공부한다. 하지만 조선이라는 동아시아의 생소한 국가에 파견할 선교사 한 명을 찾지 못한다는 소문을 듣고 조선에서의 선교 활동을 결심한다. 당시 언더우드가 약혼녀와 조선에 함께 가는 문제를 두고 나눴다는 대화가 전해진다.


"그 곳에서는 무얼 먹고 살고 있나요?"
"모르겠소."
"병원은 있나요?"
"모르겠소."
"그럼 당신은 조선에 대해 아는 게 뭔가요?"
"내가 아는 것은 오로지 그곳에 주님을 모르는 1,000만의 민중이 살고 있다는 것 뿐이오."

 

허나 이에 약혼녀는 동의하지 못했고, 결국 언더우드는 파혼 통보를 받고 나서 홀로 조선으로 향하게 된다.

 

그가 한국으로 건너가려던 1884년에 갑신정변이 터지는 바람에 후유증으로 외국인 입국이 막혔으며, 언더우드는 1년간 일본에 머물면서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감리회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와 함께 헐버트의 도움을 받아 마가복음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 당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 가운데 한국어를 가장 잘 구사하는 축에 들었다.

 

1885년 언더우드는 호러스 뉴턴 알렌의 도움으로 조선에 입국한다. 알렌이 조선 정부에 제출한 설립안에 의거해 1885년 4월 개원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의 설립 목적에는 의학생 교육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1886년 3월 29일 개교한 한국 최초의 서양 의학 교육 기관인 제중원 의학교에서 언더우드는 수학, 물리, 화학 등 의예과 과정의 과목을 가르치면서 본격적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한다. 언더우드는 1888년에 파견된 선교사이자 제중원의 여의사인 8살 연상의 릴리어스 스털링 호튼(Lillias Stirling Horton, 1851 ~ 1921)과 1889년 3월 14일에 결혼했다. 이들의 신혼여행은 선교여행으로 평안도 지역으로 1600킬로미터를 거의 도보로 이동했다고 한다.

 

1887년 서울에서는 한국 최초의 장로회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하고, 평양부 일대 지방까지 교세를 확장했다. 이 해부터 거의 20년 동안 언더우드는 평안도 전역을 순회하는 선교 여행을 반복했고, 1891년 게일 선교사와 마펫 선교사가 여행에 합류하면서 신앙 공동체를 설립하는 등 본격적으로 서북 지역에 포교활동을 하게 된다.

 

1894년, 영국 출생의 캐나다 선교사 올리버 에비슨 (Oliver R. Avison)이 조선 정부와의 협상 끝에 제중원을 선교부로 이관받았고, 이로써 제중원은 온전한 사립 선교 기관으로 재편됐다. 1900년, 록펠러의 석유회사 '스탠다드 오일'의 창립 멤버 중 하나였던 루이 헨리 세브란스 (Louis Henry Severance, 1838 ~ 1918)가 병원 건립을 위해 제중원에 거액을 기부했다. 이 기금을 두고 평양부의 선교사들이 문제를 제기했으나 언더우드의 협조에 의해 갈등은 해결되었고, 1904년 제중원은 새로 지어졌으며 기증자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 병원, 그리고 세브란스 의학교가 되었다. 세브란스의 건립에도 언더우드의 공이 컸던 것이다.

 

번역과 교육에도 힘써서 입국한 직후부터 신약의 4대 복음서를 번역했으며, 한국에 머문 30년 동안 한국어 자료를 모아 한불 사전, 한영 사전, 한영 문법을 편찬했다. 1885년에 입국하자마자 서울 정동에 한국 최초의 고아원인 언더우드학당(경신학당)을 설립했고, 1915년에는 경신학당을 모태로 고등교육기관인 경신학교 대학부(현 연세대학교의 전신)를 설립했다. 경신학교 대학부는 1917년부터 연희전문학교의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영국 출신의 발명가이자 타자기 재벌이었던 그의 형 존 언더우드 (John Thomas Underwood, 1857 ~ 1937)가 토지 매입과 교사 건축 비용을 제공했다.

 

그러나 평양부의 새로운 교회 설립, 경신학교 설립 작업과 번역 작업으로 후유증을 얻었고, 일제가 '조선의 모든 교육자는 일본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교육 시행령을 내리면서 일본어 공부까지 겹쳐 과로로 몸을 상하게 된다.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자 1916년 4월 미국으로 건너가 치료를 받으며 요양했으나 결국 그 해 10월 16일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그의 시신은 한국으로 옮겨져 양화진 외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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