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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열전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1858-1902년)

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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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감리회 선교사. 1885년 조선에 왔으며 선교와 교육 사업에 힘을 썼다.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을 한 적은 없으나 그가 설립한 배재학당은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했다.



생애

미국 펜실베이니아 사우더턴(Souderton)의 스위스계·독일계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펜실베이니아에 정착한 5세대 이민자 가정이었으며, 부계는 스위스, 모계는 독일 팔츠 지방 출신의 이민가정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 기디언(Gideon)은 독일개혁교회 신자였으며, 어머니 머리아(Maria)는 재세례파의 분파인 메노파(Mennonite) 신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펜젤러가 어렸던 시절에도 독일어로 된 마르틴 루터의 성경을 반복해서 읽어주곤 했고 집에서 거의 독일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아펜젤러는 어려서부터 독일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이후 성장하여 펜실베니아의 프랭클린 마셜 대학을 졸업하고 뉴저지 주의 드루 대학의 신학부에서 수학하고 졸업했다. 가풍의 영향으로 본래는 장로회 신자였으나 성장하며 교단을 옮겼으며 한국에선 감리회 선교사로 활동했다.


희비교차가 되는 부분인데, 처음에는 조선이 아니라 인도 제국에 선교활동을 하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이는 언더우드도 마찬가지로 인도 제국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1883년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에서 개최된 전미 신학교 연맹 수련회에서의 기록까지만 봐도 인도행에 대해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로 미국인의 선교 활동이 자율화 되자 조선행이 가능해졌던 게 결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아펜젤러의 변화는 1884년 프린스턴 신학교 선교 모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1885년 부활절인 4월 5일에 갓 혼인한 그의 아내 엘라와 함께 장로회 선교사인 호러스 언더우드 그리고 같은 감리회 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튼과 그녀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과 함께 조선에 입국하려 했으나 조선 땅을 밟자마자 미군 측의 조지 클레이턴 포크(George Clayton Foulk) 대사가 "조선의 정세가 위험하여 젊은 여성(아펜젤러 부인)은 입국할 수 없다"고 불허하였다.


결국 아펜젤러 부부는 잠시 일본으로 가 머물다가 7월 29일에 다시 입국하였다. 비록 입국이 미뤄졌으나 그 날짜에 의의가 있기에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언더우드, 스크랜턴 모자, 아펜젤러와 함께 이 날을 한국의 개신교 최초의 날로 본다. 여담으로 이 때 배에서 내려 입국할 당시, 처음에는 무심코 아펜젤러가 먼저 내리려 했다. 그러다가 최초로 한국 땅에 발을 내딛는 중요한 순간임을 깨닫고, 자신의 아내인 엘라가 먼저 내리게 했다. 진정한 로맨티스트


이후 조선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국내 최초의 서양식 사립학교이자 감리회 종립학교인 배재학당을 설립하였다. 배재학당은 감리회를 학교 이념으로 하여 세워지긴 했지만, 아펜젤러는 언더우드처럼 종파와 교리에 상관없이 조선인들에게 선교활동을 펼치라고 가르침을 행했다. 이때가 그의 나이 겨우 27세였다. 배재학당의 학훈인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겨라.'를 만들었고, 그의 아들인 헨리 다지 아펜젤러는 배재교가를 작사작곡했다. 모교 프린스턴 대학교의 응원가를 개사해 만들었다고 한다. 배재학교의 교표가 프린스턴 대학의 교표와 비슷한 이유도 바로 이것.


1902년에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에 위치한 어청도 앞 바다에서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 번역자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대판산성주식회사의 구마가와마루 호에 타고 있다가 같은 회사의 선박 기소가와마루 호와의 충돌사고로, 성경 번역 작업에 동참하기 위해 같이 승선한 조한규와 정신여학교 학생을 구하려 탈출을 미루었고 결국 바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순직하였다. 아펜젤러의 시신은 현재까지도 인양하지 못했으며,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가묘가 만들어져있다. 이런 아펜젤러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서천 지역에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이 세워져 운영되고 있다. 한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는 서로 절친한 친구였고, 교류도 왕성하여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연세대학교에는 아펜젤러의 이름을 딴 아펜젤러관(사적 제277호)이 있다.



평가

인성적인 면에서든 활동적인 면에서든 구한말의 인물들 중 여러모로 귀감이 되는 이로, 현대에서도 그를 존경하는 이들이 많다. 개신교계를 비롯해 역사학계와 교육학계에서도 그의 업적과 행보에 따른 역사적 의의 때문에 연구하는 이들이 많다. 또한 직접적인 조선의 독립 운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하거나 당시 조선에서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던 이들을 교육 및 계몽하는데 힘써 독립운동사에도 의미를 갖는 인물이다. 학생 인권단체이자 독립운동 단체였던 협성회를 조직한 것도 아펜젤러가 최초이다. 또한 아펜젤러가 세운 정동제일교회는 독립운동가들의 산실 중 하나였다. 일단 종교 시설로 당시 경찰행정의 손에서 피할 수 있었고,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이 운영하고 있으니 일제로서는 마음대로 드나들 수가 없었다. 유관순 열사의 장례가 치뤄진 곳도 바로 정동제일교회.


배재고등학교는 창립자를 기리기 위한 아펜젤러의 동상과 초상화 등을 소장 중이다. 관심이 있는 위키러라면 외부인 개방 시간에 배재고등학교 정문의 수위실에 문의를 하고 직접 볼 수 있으니 참고. 그 외엔 정동제일교회 근방에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이 운영되고 있으므로 여기서도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선교활동

  • 지식인 출신 선교사 답게 조선에 있어서도 독자적이거나 다른 선교사들과 연합하여 학술 활동을 꾸준히 하였는데, 이 같은 아펜젤러의 노력은 한국의 개신교의 근본에 큰 기여를 했다.
  • 입국 직후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한국선교사회 설립.
  • 배재학당 설립.
  • 한국 성경번역부에서 언더우드와 게일 등을 비롯한 여러 선교사들과 함께 마가복음, 마태복음 한국어 번역.
  •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 설립.
  • 서울지역과 인천지역에 내리교회 설립.
  • 성경 보급을 위한 출판사 및 서점 설립에 관여(1890년 조선성교서회, 대한기독교서회와 구 종로서적의 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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