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백성] Back to Basics
말씀 - 하나님의 말씀 듣기(2)
본문
오늘은 지난 번에 이어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살펴보고,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나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까지 알아보겠습니다.
다섯째,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사무엘상 16:12~13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 사무엘이라는 영적인 권위자를 통해서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세우신 영적인 권위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나눔 가운데서도 우리가 의식하지 않은 사이에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시는 것을 대언, 예언이라고 표현하죠.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을 그 사람의 입에 두어,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대언과 예언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통해 들은 모든 것을, 무작정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1:8~14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우리는 다른 사람을 통해 들은 것에 대해서 반드시 성경을 통해 분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성경에 기록된 기본적인 영적인 법칙에서 어긋난 것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에서 말하는 것들을 항상 비교해서 살펴봐야 합니다.
여섯째, 강한 소원이 Vision, 부담감, 감동(깨달음)을 통해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마음에 소원을 두고 그 소원을 통해서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일상 가운데 겪게 되는 작은 사건을 통한 감동과 깨달음 안에서, 그리고 어떤 일에 대한 부담감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곱째, 환경을 통해
출애굽기 13: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때로는 주변의 환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는 민감히 귀 기울일 필요가 있는데, 그 이유는 대부분의 환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환경은 늘 변하기에, 그렇게 쉽게 변하는 환경으로 신실하신 하나님을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 그런 환경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덟째, 설교나 강의(배움)을 통해
호세아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우리가 교회에서 듣는 설교나 혹은 세미나, 성경공부를 하는 등의 배움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계속해서 늘려가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아는 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여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나 다른 모임에서의 목사님 설교, 그리고 세미나, 성경공부 등의 강의를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아홉째, 예배를 통해
예배를 드리고 있으면, 우리가 이제까지 알아봤던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찬양의 가사나 성경 구절, 설교, 기도 등 앞에서 얘기했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많은 방법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한 이유는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예배자 간에 상호적으로 교류하는 장소입니다. 예배의 교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면, 이에 대해 우리가 반응을 하는 것이죠. 그렇기에 예배를 드리며 내 안에서 어떠한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예배는 하나님과의 교류가 없는 예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는 어떠신가요?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반응할 수 있는 그런 예배가 되었으면 합니다.
2번에 걸처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법 9가지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물론 이 9가지 방법 외에도 더 다양하게 말씀하시지만, 9가지라는 큰 카테고리 안에 포함되어 있기에 더 세분하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미처 발견하지 못한 방법으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반드시 그 말씀이 정말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인지를 성경을 펴놓고 검증해야 됩니다. 이렇게 확인하는 작업 없이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들에게 태초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말씀을 하시고, 음성을 들려주시는데 그 말씀이나 음성을 아예 듣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잘못 듣는 사람도 있고, 잘 들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분별이라는 확인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제까지,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내적으로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성령님을 통해 우리의 생각으로 전달해 주시는 것이죠. 내적인 음성 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다른 방법들도, 결국은 생각이라는 영역을 통해서 내 안에 해석이나 판단을 하게 되죠.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서 생각이라는 영역은 무척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생각의 영역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하나님의 차원과 가장 가깝기 때문입니다.
순복음에서 말하는 4차원의 영성으로 보자면, 하나님의 차원은 4차원 이상이죠. 그 높은 차원을 우리가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단순히 3차원이죠.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약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인 우리에게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4차원적인 요소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생각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이렇게 4차원적으로 존재하는 생각이기에, 그나마 하나님의 차원에 가까운 생각의 영역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그래서 생각이 중요하죠. 이 생각은 곧 “세계관”이고,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가는 ‘기초’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되었으면, 그래서 세상의 세계관이 아니라 성경적인 세계관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전의 가치관들은 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보통 그렇지 못하죠. 왜냐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버리지 못하고 붙잡고 있는 가치관들은 생각 속에서 영향을 미쳐, 내 삶을 왜곡되게 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잘못 듣게 만들거나, 잘못 판단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생각 속에서 자리잡게 된 사고방식을 몇 가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합리주의
합리주의란,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합리적으로 이해된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생활 태도나 사고방식입니다. 과학적인 사실이나 논리적인 설명을 통해 자신이 이해가 되는 말이나 사람을 신뢰합니다. 보통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면, 이 말씀에 대해서 합리적이 이성적으로 자신을 설득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합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으면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습니다.
둘째, 경험주의
경험주의란, 인식의 바탕을 경험에서 찾는 것입니다. 결국 나 자신이 경험한 사실에 근거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이죠.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살아갑니다. 물론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얻게 된 것은 어떤 사실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의 이치, ‘일리’라고 말하죠. 경험을 통해서 얻은 사실은 ‘일리가 있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일리’는 말 그대로 어떤 면에서 타당한 근거가 있는 하나의 이치에 불과합니다. “진리”는 아니죠. 진리는 하나님 말씀 뿐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사람들이 각자가 주장하는 이러한 일리들이 싸우고 부딪히게 됩니다. 각자의 입장에서는 분명 맞는 말이기 때문이죠.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이전에 들었던 경험과, 당시에 느꼈던 상황 속의 감정을 의지합니다. 그래서 그것과 같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셋째, 성공주의
성공주의는 ‘실용주의’와 같은 맥락으로 유용성과 효율성을 중요시 하고, 결국 성공하는 것이 진리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말하고 있는 ‘결과’에서의 성공을 중요하게 생각하죠. 물론 성경에서도 성공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성공은,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성공은 바로 “순종”입니다. 결과가 아닌 과정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성공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결과는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말하는 결과의 성공이 중요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시면, 그 말씀대로 행하게 되었을 때, 그 결과의 성공 여부를 계산하고, 성공하지 못할 것 같으면,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넷째, 신비주의
신비주의란, 하나님으로부터 내적인 직관이나 영적인 체험, 다시 말해 신비한 영적인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비한 영적인 체험을 위해 시간을 투자합니다. 그러한 영적인 집회를 찾아다니며 체험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셨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인해 더욱 충분히 영적인 존재입니다. 무언가를 하거나, 신비한 경험을 해야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신비한 경험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신비한 방식으로 말씀을 주지 않으시면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하죠. 많은 꿈을 꾸고 환상을 경험하지만 어느 것이 하나님을부터 온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어합니다.
다섯째, 문화주의
문화란, 함께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에 의해 습득, 공유, 전달이 되는 행동 양식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화는 보통 나라에 적용을 많이 합니다. 똑같은 사람이 모여있어도 나라에 따라서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다르죠. 그런데, 이런 문화는 단순히 나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어느 공동체에도 그 공동체만의 문화가 있죠. 똑같은 하나님을 믿는 교회인데도 교단에 따라 믿는 문화가 다릅니다.
또한 같은 순복음교회도 제가 겪었던 여의도나, 북서울이나, 도봉이나, 중동 모두가 다릅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 청년대학부도 각 팀이나 소그룹별로 문화가 존재합니다. 그 공동체만의 생활 양식, 행동 양식이죠. 커뮤니케이션 방식이기도 합니다. 아마 똑같은 설교를 들어도 공동체별로 해석하거나 받아들이는 부분이 분명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문화주의죠. 가정이나, 직장이나, 학교나, 공동체가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이런 각자만의 문화가 존재합니다. 이런 문화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공동체 문화의 양식으로 왜곡되게 만들고, 판단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섯째, 권위주의
권위주의란, 일반적인 사실이나 상대의 의견보다는 기존의 권위자에 기대어 사람을 대하거나 사태를 해석하는 사고방식이나 행동 양식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보다 권위자나, 권위자의 말을 더 듣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권위자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죠. 우리에게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권위자는 부모님이십니다. 그 다음으로 만나는 권위자는 선생님이죠. 그 다음으로는 사회적인 권위자, 다시 말해 상사가 되겠죠.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권위자의 말이 서로 부딪히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권위자의 말을 따르게 됩니다.
위에서 살펴본 여섯 가지 외에도, 우리 생각 속에서 하나님을 말씀을 듣는 것을 방해하는 가치관들이 존재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가치관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방해가 되는지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때,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믿는 대상은 결국, 그 말을 듣고 순종하는 대상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3:11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하나님께서는 지금 아담에게 ‘너는 내 말을 안 듣고 도대체 누구의 말을 들은거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말씀을 받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지 믿지 않는지를 아는 방법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대상으로부터 말을 듣고, 그 말대로 살아간다면, 아담이 범했던 죄를 그대로 우리가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말을 듣기를 원하시나요? 그리고 누구의 말대로 살기를 원하시나요? 그 선택은 여러분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책임 역시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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