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백성] Back to Basics
예배 - 어떻게 예배할까?
본문
저는 모태신앙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어릴 적부터 교회를 나왔습니다. 하나님을 믿었다기 보다는 정말 말 그대로 교회를 나왔죠. 교회를 나온 중요한 이유는 예배가 끝나고 집에 가기 전에 버스 정류장 근처 노점에서 어머니께서 사주시는 쥐포를 먹기 위해서였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이 쥐포를 먹기 위해 저는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2학년부터 정식으로 등록해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것도 말 그대로 다닌거죠. 마치 학교나 학원을 다닌 것처럼 말이죠. 그나마도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주일예배를 종종 빠졌습니다. 당시에는 동네마다 동전을 넣고 게임을 하는 오락실이 있었는데, 헌금할 돈을 가지고 오락실에 가서 오락을 하다가 교회는 안가고 바로 집으로 돌아갔죠. 이렇게 한 번, 두 번 빠지다보니까 교회에 다시 나가면 선생님께 혼이 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점점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거의 2년을 나가지 않았죠. 그러다가 다시 중학교 1학년부터 나가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는 예배를 드리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제가 장난도 좋아하고 주의가 산만한 편이라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습니다. 그런 아이가 한 두시간을 자리에 묶여서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찬양은 부르는데 가사도 모르겠고, 앞에서 자꾸 시키는게 왜 이리많은지.. 거기다가 손은 또 왜 드는지.. 그 순서들이 저랑 너무 맞지 않았습니다. 왜 꼭 이렇게만 해야 하나? 자유롭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당시에 많이 했습니다. 이렇게 예배 드리기를 너무나 힘들어했던 저는, 중학교 3학년 때 부흥성회에서 하나님을 처음 만나게 되면서, 조금씩 바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예배를 드리면서 왜 무언가를 자꾸 시키나? 손은 또 왜 드나? 자리에서 왜 자꾸 일으켜 세우나? 예배를 드리는 자체가 중요하지 그런게 뭐가 중요하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지는 않나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그 중심이 중요하지,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요즘은 시대가 다양성을 존중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충분히 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라고 말하고 있죠. 이전의 모더니즘이 산업혁명을 시작으로 진보적인 사회 발전을 이루어가던 시대를 뒷받침해주는 사상이라고 본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가치관에 중심을 둔 지금의 시대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항상 정답이 존재 있던 이성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정답은 없고 시각에 따른 다양한 답들이 있을 뿐이고 그 다양한 답들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어떻게 보면 창의력과 변화의 속도가 중요해진, 지금 시대에 잘 맞는 사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 안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답들에 의문을 가집니다. 정말 그럴까? 왜 꼭 그 답이어야만 하나? 이러한 질문을 시작으로 다양한 의견을 통해 창의력이 발생하게 되죠. 이 사상에서는 절대적인 가치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사상은 자칫하면, 이제까지 우리가 맞다고 생각했던 성경적인 가치관에도 영향을 줄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여러 가지 가치관도 시각과 입장에 따라서 그것이 틀릴 수도 있다고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죠. 사실 이러한 질문은 지금 시대에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태초에도 인간들에게 동일한 의문을 제기한 존재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3:1~5
그런데 뱀은 야훼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말씀에 대해서, 사단은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문에 하와가 동조하게 되었고, 결국은 하와 본인의 해석에 의해 선악과를 먹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물론 아담도 하와와 같이 본인의 선택에 의해 선악과를 먹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절대적인 가치가 없다고 말하지만, 성경에서는 절대적인 가치가 존재하고, 그 절대적인 가치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고 분명히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가치에 따라 아담과 하와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려주셨던 것이죠. 이것은 예배에 관한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기 25:8~9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출애굽기 25장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실 때,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계시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막을 만들 때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이루는 재질과 크기와 길이 등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한 치의 오차 없이 따라서 지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모든 것에는 깊은 뜻과 상징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며 우리를 만나는 곳입니다. 한 마디로 예배의 장소라고 할 수 있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그렇기에 지켜야 할 것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것에는 의미가 반드시 동반되죠. 이것은 구약에서부터 이어져 온 것이고, 우리가 당연히 지켜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하나님께 어떻게 예배해 왔을까요?
에스겔 2:1~2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 말씀을 받는 사람은 절대로 자리에서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모세는 발에서 신을 벗어서 맨발의 상태로 하나님께 나아갔죠. 이 부분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을 낭독할 때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 8:1~6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그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고 그의 곁 오른쪽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의 왼쪽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야훼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야훼께 경배하니라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한 후 가장 먼저 한 것은, 모든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학사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회중 앞에서 낭독하면, 모든 백성이 일어서서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을 듣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성경을 봉독할 때나, 목회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을 성도들에게 전하실 때, 모든 성도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 말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일어서서 예배하는 것이, 귀찮고 힘든 행동이 아니라, 성도로서 너무나 당연히 해야 하는 예배의 행위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예배하는 행위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① 일어서서
앞서 언급했던 일어서서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좋은 자세이며, 일어선다는 것 자체가 대상에 대한 존경의 표시입니다. 일어서는 것보다 조금 더 겸손한 자세가 허리를 굽히는 것이고, 허리를 굽히는 것보다 더 겸손한 것이 무릎을 꿇는 것이고, 이것보다 더 겸손한 것이 엎드리는 것이고, 이것보다 더 겸손한 것이 부복(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것)하는 것입니다.
② 손을 들고서
손을 든다는 것은 항복을 의미하죠. 하나님 앞에 우리의 권리를 포기한다는 상징을 담은 행위가 바로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손을 드는 행위는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행위가 됩니다.
③ 손뼉을 치면서
손뼉을 친다는 것은 단순히 ‘박자’를 맞추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더욱 즐거운 마음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무엇보다 손뼉을 치는 것은 대상을 환영하고 축하하고 기뻐하고 인정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④ 악기를 연주하면서
시편을 보면 모든 악기 연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노래 자체도 예배이지만, 악기 연주 자체도 예배이자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행위가 됩니다. 또한 우리의 몸은 음악에 자연스럽게 반응하게 되어 있어서 하나님 앞에 더욱 자연스럽게 찬양하고 예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⑤ 말로 선포하거나 노래를 부르면서
단순한 말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고,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면, 그 노래를 함께 부르는 사람까지도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마음이 고조되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교제하는 감동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말과 노래에는 골로새서 3장16절에 등장하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가 있는데 여기서 ‘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인간적인 감정들에 관한 말과 노래이고 ‘찬송’은 하나님의 속성, 성품 등을 높여드리는 말과 노래이고 ‘신령한 노래’는 방언으로 하는 찬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⑥ 춤을 추면서
여러분이 잘 아는 것 같이,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다시 돌아오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며 춤을 추다가 옷이 흘러내리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춤을 추는 것은 그만큼의 기쁨을 몸으로 표현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렇기에 춤을 추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귀한 사역이 될 수 있습니다.
⑦ 큰 소리로 외치면서
시편47편 1절은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외침은 하나님을 높이는 행위임과 동시에 자신을 향한 결단의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예배의 마지막 부분에 공동체의 방향성을 구호로 외치는 것도 이러한 의미의 예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방법 외에도 여러 가지로 하나님을 다양하게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구약시대에 제사가 제물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졌던 것과 같이, 우리의 생각과 판단에 대한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는, 지금도 우리의 안일함과 아집에 대한 죽음을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배는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마치 제물을 드리는 것처럼, 나의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내가 무언가를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게 드려야 할 것을 간단히 3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1) 우리의 힘을 드려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통해 쉬려고 하기 때문에 일어서거나 손을 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은 쉬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온 것이죠.
2) 준비의 값을 치러야 합니다.
예배를 섬기는 자들은 각자의 사역에서 미리 준비를 해야 하고,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은 예배의 장소에 미리와서 한 주를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 고백과 회개를 통해 마음을 정결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3) 시간의 값을 치러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주일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모스 6장 1절에 등장하는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안일한 자여”라고 말하며, 예배의 처소에서의 안일함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왕 하나님을 예배하기로 했으면 그 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하고, 가능하다면 그 이후의 시간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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