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백성] Back to Basics
사랑 - 하나님만 사랑하라
본문
세계적으로 유대인은 교육을 잘하기로 소문나 있습니다. 특히 가정에서의 자식 교육은 유명하죠. 여러분 ‘탈무드’에 대해서 들어보셨죠?
- 탈무드 : 유대교의 율법, 윤리, 철학, 관습, 역사 등에 대한 랍비의 생각을 기록한 문헌
탈무드는 유대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지혜들을 10년에 걸쳐 2천여 명의 학자들이 책으로 만든 것입니다. 탈무드는 20권, 1만 2천여 페이지에 이르며, 단어 수로는 250만 단어 이상 그 무게는 75Kg이나 되는 방대한 양이라고 합니다.
탈무드는 책으로 써지기 이전에는 교사가 학생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전해진 것들을 구전 전승이라고 하죠. 유대인들에게는 스승이자 지도자이며 부모로 섬기는 ‘랍비’라는 현자가 있습니다. 바로 이들에 의해 탈무드는 수천 년이라는 세월 동안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대인들이 자녀들과 후세에 대해서, 철저하게 교육을 하게 된 시작이 어디에 있을까요?
신명기 6:6~9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명하는 말씀을 현 세대만 마음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도 가르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르치는 방식까지 세세하게 적어 놓으셨는데, 집에 앉았을 때에도, 길을 갈 때에도, 누워 있을 때에도, 일어났을 때에도 가르쳐야 하고 이 가르칠 것을 손목에 매어 기호로 삼고,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집 문설주와 출입구에도 써서 붙여놓으라고 합니다. 엄청나게 지독한 가르침이죠. 그런데 이 가르침을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가르침이 무엇일까요?
신명기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것은 “쉐마”라고 하는 유대교의 교육입니다.
쉐마(שָׁמַע) - “듣다”를 의미하며, “경청하다”, “순종하다”라는 의미도 지님.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115회 나오며, 의미가 여러가지 방식으로 확대되는데, 대개 효과적인 들음이나 경청이라는 내용을 포함합니다.
온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 4절 “이스라엘아 들으라”에서 들으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쉐마의 인칭 단수,명령형입니다. 여기서 쉐마라는 말이 단수형으로 쓰인 것은 이 명령의 집합적이고,연대적인 성격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쉐마라는 말은 단순히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만이 아니다. 듣고 순종한다는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언약은 이스라엘 민족과 더불어 맺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언약은 언약공동체로서의 민족전체가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야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이죠.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이 쉐마의 명령은 단순하면서도,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선민으로 택함 받았기에, 그 택함 받은 민족으로 살아가야 할 당연한 방식이 바로 쉐마라는 것이죠. 이러한 명령은 어떻게 보면 이제 막 광야에서 태어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경험하기 시작하는 세대들과 그 이후의 세대들을 위해 필요한 명령이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애굽에서 태어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단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조상들의 하나님이었던 것이죠. 조상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비전을 주신 하나님이시긴 하지만, 애굽에서 태어난 자신들과는 직접적인 교류가 없는 신이었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조상들에게 구전으로 들어왔던 그런 신에 불과했죠.
이랬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이라는 커다란 사건을 통해 자신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며, 이제까지는 조상들의 신에 불과했던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신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귀로만 들었던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고,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이죠.
이렇게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려줄 법들을 계시해주시며,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물론 중간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아 40년을 돌아가긴 했지만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많은 전투를 통해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됩니다. 이제 이들은 광야에서 만났던 기적의 하나님이 아닌, 가나안 정복 전투에서 만났던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 아닌, 일상생활 속에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상생활로 돌아가야 할 백성들이 염려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여호수아 24:15~16, 19~20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니
여호수아는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백성들의 대답에도, 그 말을 온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의 성향이 어떤지는 애굽을 나올 때부터, 광야를 지나, 가나안을 정복할 때까지 수없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얼마나 연약하고, 변덕이 심하고, 자신들의 행복만을 추구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가나안에 정착하며 일상생활을 하게 된 이스라엘은, 처음에는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약속을 잘 지키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이기 때문에, 광야를 떠도는 유목생활이 익숙해서 농사에 서툴렀습니다. 그렇기에 당연히 먹고사는 것이 어려웠겠죠. 그나마 광야에서는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지만, 가나안에 정착하면서부터는, 모든 것이 끊어지게 되어서, 스스로 땅을 일구어야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들 눈에 들어온 것은 가나안의 신들이었습니다. 그 신들은 자신들의 서툰 농사를 풍요롭게 해 줄 수 있는 농사의 신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들을 구원한, 위대한 구원자로 인정하고 믿고 따르지만, 가나안 땅을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는, 농사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아닌 가나안의 신들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이 신들이야 말로 농사를 잘 아는 전문가로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구원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따르지만, 가나안에서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는 가나안의 신을 따랐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버렸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사무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상 7: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은 하나님께 속했지만, 자신들의 삶은 가나안 신들에게 속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원과 삶이 분리되어있는 것이죠. 구원과 삶이 분리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먹고 사는 삶의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따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해서는 먹고 살기가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잘 먹고 잘 살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것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죠.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과 관계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그렇게 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완성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사탄에게 속하지 않았고, 중요한 것은, 나 자신에게도 속해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것,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나 자신의 삶을 위해, 명예와 이익을 위해 사는 것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죄를 범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삶이 하나님께 속하는 것을 망설이게 만드는 이유 중에는, ‘적당히 믿는 것이 좋다’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일명 광신도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이죠.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주인 되심’을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인데, 이러한 사람은 구원하심은 인정하나 주인 되심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생각 속에는 내가 하나님을 믿고는 있지만, 그리스도인임을 말하거나 그리스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삶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는, 복음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사실, 초대교회 그 시절에도 복음은 부끄러울 수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것 자체가, 매우 부끄러운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3~25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능력과 승리와 장엄함을 의미하지만, 십자가는 연약함과 수치와 패배를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헬라인들이 볼 때, 절대적인 ‘신’이 자기 원수들에게 사로잡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미친 소리였습니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복음을 전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나 부끄러움을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복음을 자랑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하나님만 사랑한다는 것은, 이렇게 주변에서 나를 지적하고 부끄럽게 만드는 것조차도 뛰어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쉐마’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쉐마의 완성은 이것을 계속해서 다음 세대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세대를 넘어 변해가는 세상의 논리와 이슈 속에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지켜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의 기준대로 살아가지 않는 것과 그 기준에 타협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고 있는 여러 가지 논쟁들이 있습니다. 남녀 간의 문제라든가, 동성연애에 관한 문제, 진보와 보수에 관한 문제, 사회와 교회에 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현재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에 부딪혀야 할 여러 가지 사회의 이슈들이 있습니다. 그 견해에 대해서 우리는 올바른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가치관 속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우리가 배우고 익혀야 하고, 또한 이것을 다음 세대에게,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땅에서 완수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일임을 잊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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