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백성] Back to Basics
Intro -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
본문
청년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가르치신 중심 사상이 무엇일까요?” 그 때 나왔던 답변 중에 하나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네, 물론 사랑은 기독교의 핵심 가치입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613개의 율법을 10개로 요약한 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이 십계명의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 앞에 인간이 지켜야 할 것을,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인간과 인간이 지켜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자를 대신계명이라 하고, 후자를 대인계명이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두 가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다시 두 가지 계명으로 요약하셨는데, 첫째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하나로 요약하면 뭘까요? 그래서 기독교의 핵심 가치가 사랑입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삶의 방식이자 실천해야 할 윤리라고 말할 수 있죠.
하지만, 사랑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가르치신 중심 사상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중심 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며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사상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가장 처음에 하는 말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면 그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의 말씀은 바로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외치셨던 말씀입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주요 사상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보다 더 큰 개념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가장 먼저 쓰인 책이, 바로 마가복음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마가복음을 참고로 하여 좀 더 후대에 기록된 책이고, 요한복음은 4복음서 중에 가장 늦게 기록되었습니다. 이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입니다. 신약성경에 예수님께서 수 없이 말씀하신 “천국”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야말로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우리에게 그토록 말씀하신 중심 사상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흔히 사후에야 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쉽게 표현하면 하늘에 있는 나라이죠. 유대인들을 위해 쓰인 복음서인 마태복음에는, 감히 하나님이라는 말을 올리기 부담스러워 하기에 완곡하게 천국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하지만 로마인과 이방인을 위해 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원래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살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와 ‘천국’은 독자에 따라 표현을 달리했을 뿐 동일한 단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새롭게 만들어낸 사상이 아니라 구약 시대부터 이어져 온 사상입니다. 그 시작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다스리신다.”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통치권을 말하며,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말합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에덴동산은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시고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어 그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온 땅과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고,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가 널리 확장되도록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확대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나라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그 주권의 상징으로 동산 중앙에는, 이 나라의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 있다라는 것을 뜻하는 “생명나무”와 이 나라의 선악을 판단하는 모든 결정권은 하나님께 있다라는 것을 뜻하는 “선악과”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었죠.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생명나무는 허락하셨지만, 선악과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선악과는 인간의 모든 선악에 관한 결정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죠. 인간의 삶에 대한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그러한 의미를 가진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해, 인간은 선악을 스스로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주권을 하나님께 빼앗아 인간이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태초에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실패한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나라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 이후에 계획을 세우셨던 것이죠.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의 구원을 계획하시며 그에 합당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천천히 만들어가십니다.
이 때 등장하는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아브라함을 시작으로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실제를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통치권을 말하죠. 아브라함을 친히 부르시고, 그의 자손들을 통하여 성민이라 일컫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우셔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나라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정착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사를 보내셔서 직접 다스리십니다. 이 시기를 우리는 신정정치의 시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다스림을 불안해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지만, 다른 민족은 눈에 보이는 왕이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이죠.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야훼께 기도하매 야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왕을 허락하십니다. 왕정정치가 시작된 것이죠. 하나님께 있던 주권을 인간들이 다시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왕정정치를 시작으로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반짝 빛나다가 계속적으로 내리막길을 걷게 되고, 마침내 멸망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하나님 것이었던 주권을 인간이 가져옴으로 인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된 원죄이고,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된 이유이며,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범하고 있는 가장 큰 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단순히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한정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후를 보신 것이죠.
바로 예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하신 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던 주권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죄악을 대속하신 것이고,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 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날 밤, 겟세마네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지경에 이르도록 간절히 기도하셨던 장면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예수님조차도 너무나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시기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고통과 아픔과 두려움을 그대로 느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인간과 똑같이 느끼시는 분이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아픔과 고통과 고민을 공감할 수 있으십니다.
그렇게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인간과 똑같이 십자가를 지기가 무척 두려웠습니다. 육신의 고통도 힘들겠지만,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는 순간만큼은 완전한 죄인이 되기에 영원 전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과 친밀하게 함께하시던 그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는 표현을 하셨을까요?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선악의 기준에서 자신의 뜻을 하나님께 말합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그 후에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로부터 가져온 주권을, 철저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다시 하나님께 돌려 드리며 하나님 나라가 회복된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전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께 주권을 돌려드리고 우리의 죄를 대속한 순간이 바로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에 외치셨던 “때”이자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우리가 자주 듣는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already not yet” 이미 임하였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
이렇게 이미 임하였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소속된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완성해야 할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삶의 결”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태초에 인간이 받았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지상명령이, 이제는 복음을 믿고 따르는 주의 백성들이 이 땅에 가득하게 될 것을 바라보는 비전과 사명으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단순히 개인을 만져주는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개인의 삶을 직접 통치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교회 안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과 학교에서도 동일합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에는 개인의 치유와 회복이 동반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들은 믿고 따르는 자들,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 대가를 지불하는 자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 나라에 속할지 아니면 인간의 나라에 속할지 선택해야 합니다.
만일 야훼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야훼를 섬기겠노라 하니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세상에 속할 것인지, 하나님 나라에 속할 것인지 우리 자신이 선택해야 합니다. 두 군데 모두 속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말씀하실 때 그 하나님 나라는 이 땅을 지배하고 있던 인간의 나라, 세상의 나라, 사탄의 나라에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나라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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