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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수 목사

[하나님 나라 백성] Back to Basics

예배 -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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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알게된 것은, 아벨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렸다면, 가인은 하나님께서 참으시는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죠. 우리는 보통 이렇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거나, 참으시는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잘못된 예배를 드려도 참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후서 3:8~9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잘못된 삶을 살아가고, 잘못된 예배를 드리더라도 인내하시고 참으시는 이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가능한 모두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때로는 이러한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시험이 되는 경우도 존재합니다.

 

시편 73:1~3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신앙 안에서 넘어질 뻔하고 미끄러질 뻔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유는 악인의 형통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러한 고백은 구약시대 뿐만아니라 지금 시대에도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모두가 잘 먹고 잘 살지 못하고, 기도도 응답되는 것 같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를 하나 안 하나 삶에 즉각적인 변화가 생기지 않는데, 굳이 내가 하나님을 따라야 하고 믿어야 하고 예배해야 하나?” 라는 의문이나 시험이 들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의문이 들게 되면, 내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가? 라는 생각이나, 주변의 시선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문은 오히려, 신앙이 어린아이에서 청년으로 성장하기 위해 거쳐 가야 하는 자연스러운 단계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맹목적으로 로봇처럼 입력만 하면 움직이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시죠. 함께 살아가고 교제하며 깊이 알아가는 사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창조한 목적이고, 이것이 예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많이 배웁니다. 아버지로서 우리는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좋은 것으로 우리 삶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시죠.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성품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의의 뜻을 살펴보면

 

공의(公義) - 공평한 도리, 선악의 제재를 공평하고 의롭게 하는

 

공의는 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과, 모두에게 공평하게 도리를 행하는 모든 것이 포함되는 단어입니다. 이 말을 풀어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으로 이 세상을 심판하시지만, 또한 이 세상의 모든 창조물을 공평하게 의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기에, 모든 창조물에게 보편적인 은혜를 내리십니다. 자연의 질서와 영적인 법칙들이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나가면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동일하게 비를 맞게 되고, 아침이 되면 해가 뜨는 것도 선인이나 악인이나 관계없이 동일합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자라 할지라도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심은 대로 이 세상에서 열매를 거둘 수 있게 하십니다. 물론 이것은 단지 이 세상에서만 해당되는 열매이지, 하나님 나라에서 거두게 되는 열매는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물에게 보편적인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는 경우가 바로 이러한 보편적인 고난에,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내가 포함이 될 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가정이 깨지거나, 예상하지 못한 사건들로 인해 몸과 마음이 무너지는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의 주인이시기에 모든 피조물에게 공의로우셔야 합니다.

 

레위기 19: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만약 내가 송사할 일이 생겼는데, 그 송사를 맡은 재판장이 상대방하고 친하고 잘 알기에 나에게 불리한 판결을 한다면, 이것보다 억울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시기에 모든 피조물에게 공평하게 의로우셔야 합니다. 다만,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특권이 있는데, 그 특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이로 인해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혜와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참으시고 인내하시는 이유와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가능한 모두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죠.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잘못된 반응을 하게 됩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떠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의 공의와 나의 의가 부딪히게 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선과 나의 선이 부딪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욥기 40:8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잘 먹고 잘 살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것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죠.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님과 관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관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이, 서로 관계하며, 서로의 존재 자체가 삶의 기쁨이 되고 삶의 이유가 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와 그렇게 깊이 교제하는 사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 교제와 관계 안에 머물고 거하기를 원하시죠. 그래서 우리에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러한 관계에 있죠.

 

하지만 우리의 목적은 여기에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결국 우리는 그 목적에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그 목적에 부합되지 않으니 떠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 나의 의, 하나님의 선과 나의 선이 부딪히게 된 것은 태초에 우리가 지은 원죄 때문입니다.

 

창세기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뱀이 하와에게 말하였던, 우리가 지은 죄의 진정한 실체이자, 원죄는 내 삶의 선악을 스스로 판별하게 된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선악이 중심이 되어 살아갔지만, 하나님의 중심된 자리를 나의 선이 자리 잡게 되어, 인간 스스로 자신의 선악을 판별하며, 자기의 의로운 선택으로 살아가게 되었죠.

 

이렇게 인간이 선악을 알게 되자, 서로의 선악이 부딪히게 됩니다. 나의 선이 다른 사람에게는 악이 될 수 있고, 나의 악이 다른 사람에게는 선이 될 수 있게 된 것이죠. 이렇게 서로의 선악의 기준이 달라서 싸우게 되자 생기게 된 것이 도덕과 윤리, 사회규범과 법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선이 인간이 생각하는 악이 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선한 방향과 다르기에 하나님 뜻을 어기게 되고, 인간은 자신의 생각하는 선한 길로 가다가 결국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길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에서 다루고 있는 죄의 본질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죄인이 아닌 자들이 없습니다. 내 삶의 선택권을 내가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주권을 찬탈한 죄인인 것입니다.

 

이러한 부딪힘으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떠나는 자들이 생기게 되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자들이 생기게 됩니다.

 

사도행전 19:13~15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 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사도바울이 행하였던 수많은 기적은, 기적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자 부차적으로 발생하는 작은 일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은 기적 자체를 목적으로 해서 그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분이 아닙니다. 램프만 닦으면 나와서 우리가 비는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의 지니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하나님의 선이 아닌 나의 선대로, 나의 가치관이자 세상의 가치관대로, 내가 주인된 나의 목적대로 살고 있기에, 무언가 내가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들이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란 서로를 알려고 하고, 서로를 즐기려고 하고, 서로 더불어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게 친구죠. 나를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은 절대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하나님은 영적인 부모님이라 이용해도 되는 걸까요? 육체적인 부모님도 자식들이 본인들을 이용만 하려고 하는 것을 안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요? 하나님께서도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하나님을 이용하려고만 한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요? 그렇게 아픈 마음을 담담히 가지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오늘도 참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에서 침례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복음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예수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고 있던 침례요한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 자랑하던 유대인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그 이름에 맞게 하나님이 참으시는 예배를 드리지 말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내 가치관을 내세워 하나님을 떠나거나 조정하여 이용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며 더불어 삶을 즐기는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하는 삶을 살게 되면,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것을 계획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참으시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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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6 13: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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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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