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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수 목사

[하나님 나라 백성] Back to Basics

예배 - 우리가 예배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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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교회에 오면 가장 많이 하는 것이 뭘까요? 아마 예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교회학교에서부터 이미 수없이 들어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예배하는 이유에 대해서 기본적인 부분부터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배에 관한 표현을 보면 제가 조금 전에도 사용한 단어가 “예배를 드린다”라는 표현과 “예배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또 다르게는 “예배본다”라는 표현도 종종 사용됩니다. 어느 것이 맞는 표현일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단어가 어떤 뜻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배(禮拜) - 예의(禮) + 절하다(拜) 예의를 다하여 엎드려 절하다.

 

예배란 예의를 다하여 대상에게 엎드려 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예배라는 단어가 나올 때 ‘하다’라는 동사가 붙게 됩니다. 이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예배한다”가 가장 적합한 단어라고 말할 수 있죠. 예배는 우리가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헬라어로는 “프로스퀴네오”인데,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법에는 맞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 조금 더 겸손하게 예배하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예배드린다”도 나쁘지 않은 단어 선택입니다.

 

하지만, “예배본다”는 표현은 문법에도 맞지 않고, 무엇보다 예배자의 자세로서도 결코 좋지 않은 표현입니다. 보통 ‘예배본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예배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배를 그냥 구경하러 온 것이죠. 이러한 수동적인 반응은 참된 예배를 방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예배는 어떤 것에 근거한 행동일까요? 이 부분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이 왜 창조되었는지에 대한 부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창조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오늘 본문인 이사야 말씀에 잘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찬송이란 뭘까요?

 

하나님을 찬송해보라고 말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실건가요? 보통 찬송가나 복음성가 등의 노래를 부릅니다. 물론 이것도 찬송에 들어가지만, 좁은 의미에서의 찬송입니다. 더 큰 의미에서 찬송의 뜻은 이렇습니다.

 

찬송(찬양)

① 특정 대상에 대해서 미덕을 기리고 칭찬함

② 아름다움이나 훌륭함 따위를 기리고 드높임

 

Praise – 호평, 찬사, 찬송, 숭배, 칭찬하다, 칭송하다, 높이 평가하다

 

찬송, 찬양, 영어로 Praise는 바로 대상을 칭찬하고 높이는 행동입니다. 다른 대상을 높이고 칭찬하는 것을 말하죠. 다시 말해 노래도 찬송이나 찬양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음악적인 요소가 아닌 말로도, 때로는 행동이나 글로도, 그리고 각종 예술적인 행위들로도 하나님을 칭찬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찬송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것은, 찬송을 하기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어떤 사람을 칭찬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저 보이는 겉모습만 칭찬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면 세심하게 칭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신을 칭찬하고 높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인간들이 자신을 찬송하게 하려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피조물인 인간과의 “관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찬송을 통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관계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관계를 맺기 원하십니다. 서로 깊이 알기를 원하시는 것이죠. 사람끼리도 서로를 알기 위해서는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 대상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겠죠. 서로 시간을 많이 보내야 합니다. 데이트도 하면서 서로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해야 하죠. 그렇게 시간을 같이 보내도 관계를 확인 받고 싶어합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서로의 사랑을 확인 받고 싶어하죠.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랑을 서로 확인하듯이, 우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리고 천국에 가서도 계속적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선교란 예배가 없는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 예배는 보통 3가지 종류로 분류하고 있는데, 첫째 개인예배, 둘째 회중예배, 셋째 생활예배입니다. 교회나 다른 곳에서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보통 회중예배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이 회중예배만이 예배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회중예배도 예식 속에서 드렸던 성인 중심의 예배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다양성을 모른 채, 예식적인 부분만 경험했기 때문에 보통 예배를 지루해하고 힘들어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물론 예배는 예식적인 부분이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예식적인 부분은 그 속에 상징적으로 숨겨져 있는 하나님을 향한 존중과 경배와 순종의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배는 예식적인 부분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배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관계 자체가 예배죠. 사랑하는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고 싶다면, 이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예배의 예식적인 부분이 사랑하는 사람끼리, 어떤 기념일을 그 날에 맞게 챙겨주는 것이나, 결혼을 준비하는 경우 약혼식이나 결혼식을 진행하는 것으로 비유한다면, 예식 외적인 부분은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 대화도 하고, 데이트도 하고, 취미생활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방식은 여러 가지로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인 “예배”도 다양함이 있습니다. 그 다양한 것들 모두가 예배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양한 예배를 통해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자신을 더 깊이 알아가고, 그렇게 알게 된 자신을 우리들이 칭찬하고 높여드리기를 원하시는데, 그 중에서 음악이 있는 찬송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생각하십니다.

 

시편 150:1~6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야훼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여러 가지 악기들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찬양하라고 말하며, 또한 우리들의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분명히 가르치십니다.

 

시편 149:1

할렐루야 새 노래로 야훼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새 노래에 대한 해석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해석이 말 그대로 새로운 노래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르는 곡이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하나님 앞에 새로워야 하고, 예전 노래에 대해서 싫증 낼 수 있는 인간을 위해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는 새로운 노래로 찬양 드릴 때 힘들어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노래를 배우는 것은 필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노래로 하나님을 자신을 찬양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두 번째 해석은 새로운 마음입니다. 이것은 곧 기존에 부르던 곡이 새롭게 묵상이 되어서 내 안에서 새로운 결심으로 부르게 되는 곡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노래만을 좋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전의 곡이나 찬송가에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존의 곡들도 충분히 훌륭한 곡입니다. 단지 이것을 깊이 묵상하고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해석으로 부르지 못하기 때문에 곡에 대한 감동이 없을 뿐입니다.

 

결국 우리가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와 새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같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그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더욱 집중된 찬양을 드리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라는 것이죠.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간들이 아니라는 것이죠.

 

예배에 관한 미국식 영어 표현을 보면 Worship과 Service가 있는데, Worship의 뜻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예배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Service라는 단어가 쓰이면서, 예배의 의미에 혼란을 주게 됩니다.

 

Service는 봉사, 접대 등의 뜻으로, 주로 사람을 섬긴다는 의미의 사람 중심의 단어입니다. 어떻게 보면 Worship과는 상충 되는 단어죠. 보통 Service가 쓰일 경우는 반드시 Worship이 앞에 붙어서 ‘Worship Service’라고 사용됩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예배의 가치관에 혼란이 옵니다. 결국 예배도 서비스다. 서비스는 어떤 것이냐? 바로 사람을 접대하고, 대우하며 사람이 예배하기 편하게 해야, 사람 중심이 되어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Worship Service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생기게 된 잘못된 결론입니다. Worship과 붙어서 사용되는 Service는 이런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Service - 종교상의 예식, 예배의 의식, 절차

 

Worship Service는 바로 예배의 절차를 성도들에게 알려주는 안내판에 쓰이는 것일 뿐입니다. 그 절차를 알려주기 위함이죠. 물론 사람들에게 알려준다는 의미에서 사람을 배려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예배가 사람을 서비스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예배 안에서 하나님께 더 집중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친밀하게 만날 수 있는가? 이것이 예배 안에서 성도들을 위해 생각하고 배려할 부분이지, 다른 편의를 위한 배려는 예배 안에서 우선순위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배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배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중심의 예배’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부분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중심으로 예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예배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사람 중심으로, 자기 중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하였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말라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라기 1:6~10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야훼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야훼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만군의 야훼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만군의 야훼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야훼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아버지로 공경함이 어디있으며, 나를 주인으로 두려워함이 어디있느냐? 공경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을 한 단어로 “경외”라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물음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이렇게 되묻습니다. “우리가 언제 주님의 이름을 멸시했습니까?” 이 말인즉슨,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떠난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이스라엘은 그동안 자신들이 해왔던,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예배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그런 적이 없다고 하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이스라엘이 어떻게 자신의 제단을 멸시하고 더럽혔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오죽했으면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며, 그렇게 예배하는 너희를 기뻐하지도 않고 그렇게 너희가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주권을 내가 가져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인데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모든 결정권을 스스로 쥐고,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자기 중심성’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죄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편한대로, 형편대로, 눈 먼 것과 저는 것과 병든 것을 제물이라고 하나님께 들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조차도 전혀 모르고 있죠.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의 아버지이고 주인인데 나를 경외함이 어디있느냐?” 이러한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이스라엘처럼 “하나님, 저는 이제까지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믿고 예배했습니다. 전 하나님을 절대 떠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나 중심으로 예배했던 삶을 하나님께로 돌이켜, 하나님께서 주인되시고 중심되시는 예배를 드리시겠습니까?

 

우리가 예배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진실된 교제를 하기 위함이고, 진실된 교제는 하나님 중심의 예배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 중심의 예배에서 하나님 중심의 예배로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해야 할 것은, 내가 예배의 주인 노릇을 했다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가 드리는 예배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셨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제는 그렇게 인정한, 하나님이 주인된 예배를 드리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그래서 매 순간 나를 간섭하시는 데로 따라가기로 결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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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6 13: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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