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세 유형의 사람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깨어 있어야 하는가?
본문
흔히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대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지막 때"라고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마지막 때라는 것에 대해 적극 동의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에수님이 나팔 소리와 함께 오신다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을 만큼 우리는 지금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언제 오실지 아무도 모르고 어느날 갑자기 도적같이 오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깨어 있어야 하는가?
이에 대한 질문의 해답은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오실 때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마태복음 2장 1-12절 보면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오실 때의 사람들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이중 첫번째 유형의 사람은 헤롯왕이다.
이 때 나이 대략 70세의 나이가 되는 헤롯왕은 메시야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겉으로는 경배하려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의 내면에는 갓 태어난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이 태어난 곳을 알리지 않자 태어난지 2년 이하의 아이들을 몰살한 것이 그 증거이다.
헤롯왕이 이런 끔찍한 짓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였다. 그래서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했다.
오늘날 헤롯왕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보다 자기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중요시 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된 삶이 아닌 내가 주인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많다. 결국 말씀 중심의 신앙 생활이 아닌 자기 중심의 종교 생활을 하곤한다.
두번째 유형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다.
이들은 메시야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철저하게 무관심하게 대응을 했다. 헤롯의 질문에 선지자들의 예언에 따라 메시야가 베들레헴 작은 마을에서 태어날 것에 정확하게 알고 있었지만 이들 중 그 누구도 메시야로 오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러 가지 않았다.
또한 이들이 대답을 보면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메시야에 대한 말씀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말씀에 대해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이 땅에 오신 메시야를 환영하지 않았다. 이들이 주의깊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자신들만의 풍족한 삶이었다. 그러다보니 물질이 우상이되고, 메시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되었고 덩달아 유대인들을 믿음 가운데 이끌어 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자기 자신 뿐이었다.
이러한 이들의 무관심은 후에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할 때에 백성들로부터 인기가 치솟자 시기와 질투로 변했다. 또한 말씀에 대한 무관심은 이들의 삶을 형식주의적인 종교생활에 빠드리게 되었다. 결국엔 예수님으로부터 "회칠한 무덤"이라 책망을 받았던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하였다.
오늘날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유형은 말씀에 대해 지식으로는 알고 있지만 삶은 말씀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오로지 자신들의 편안한 삶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지식로만 아는 삶과 믿음으로 사는 삶을 분별해야 한다.
마지막 세번째 유형으로 동방 박사들이 나온다.
성경은 동방 박사의 이름이 무엇인지, 어느 민족인지,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몇 명인지에 대한 정보가 나오지 않는다. 단지 몰약과 황금과 유황이라는 선물 때문에 사람들은 세 명이라 추측할 뿐이다.
이방인들은 동방 박사들은 누구나 다 보는 밤하늘의 별을 보고 메시야가 태어난 사실을 깨달았다.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별을 봤지만 오직 동방 박사들만이 메시야의 탄생을 알았다. 그리고 이들은 먼거리를 걸어서 또는 짐승을 타고 메시야를 찾아 여행을 떠났다.
이들의 여행은 1-2주의 여행이 아니었다. 오늘날 처럼 교통편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라 수개월을 걸어 사막과 광야 등을 헤치고 나아갔다. 때로는 강도와 사나운 들짐승을 만나 죽을 수도 있는 힘든 여정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메시야를 만나 경배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베들레헴까지 가셔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을 누렸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고난의 삶의 연속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삶을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 말하고,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좁은문, 십자가의 길이 허락된 이유는 예수님을 주인된 삶을 살아가도록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축복이다. 이 길을 통해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는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말씀을 준비하다가 문득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묵상을 했다.
하나님의 자녀된 그리스도인들은 동방 박사처럼 다시 오실 예수님을 사모하며 포기하지 않고 계속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을 수도 있는, 생명의 안전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찾아 나아갔던 동방 박사들처럼 나의 생명과 주권을 포기한채 내 삶의 주인이자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경배하며 나아가야 한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나의 내면에 어떤 유형이 숨어있는지 찾아봐야 한다. 말씀 가운데 머물면서 내면 구석 구석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있는지 내면을 돌아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하다. 컴컴한 밤하늘 속에서 한 별이 나타나 동방 박사를 메시야이신 아기 예수님께 인도한 것처럼, 성령님은 마지막 때에 살아가는 우리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실 것이다.
성령 하나님,
내 마음을 주관하여 주사 곧 오실 예수님을 향해 달려 나갈 수 있도록 발걸음을 인도하여 주십시요.
제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영을 부어주사, 나의 소망되신 예수님만을 사랑하며 섬기는 종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마라타나,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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